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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부재+의미의개방=판단의보류
- 한금현


“이미지란 결국각자가 만들어 낸 허상과 믿음 속에서 수많은 진실로 부유하는 어떤 것일 뿐이다.
결국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1

틈새,차이
[Utopia]는 백승우가 북한에서 제작한 홍보용 사진을 디지털 사진 조작으로 재구성한 작업으로 2008 년에 제작된 연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중 하나인 이미지를 13 개로 분할하여 작가가 임의로 선정한 13 개국에 보내 인화한 후 재조합하여 완성하였다. 2 작가는 13 개 나라에 같은 수치의 사진 데이터를 주고 공통된 인화지를 지정해주면서 그 외의 색조정이나 임의의 조작을 하지 말 것을 특별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같은 조건으로 주문했는데도 13 개 나라마다 각기 다른 색의 이미지가 도착했다. 이론상으로는 같은 데이터를 보내면 같은 색의 사진이 나와야 하는데 실제로는 조금씩 다르고 몇 개는 같은 데이터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히 다른 색의 이미지가 돌아왔다. 사진 작가에게 이미지의 색조정은 무척이나 까다로운 문제이다. 같은 데이터를 가지고도 매번 색을 맞추느라고 애를 먹는다. 어디서 인화하느냐에 따라 색감에 차이가 많이 나서 많은 한국의 사진 작가들이 비싼 운송료를 내면서까지 굳이 외국으로 보내 인화를 한다고 한다. 한때 유행처럼 번진 국내 작가들의 해외 인화가 사진 선진국에 대한 사대적인 발상인지 개인적인 취향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라마다 차이가 존재하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사진 작가로서 기본적으로 갖는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고민은 자신의 사진에서 색 차이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하여 사회 구석구석의 틈새에 끼어 있는 차이를 인식하는 계기로 발전한다. 기능성과 효율성을 우선으로 하는 사회 구조에서 이러한 차이는 무시되거나 체계적인 구조를 위해 요소들을 동질화하는 과정에서 간과되어버린다. 이러한 사회 구조의 틈새 안에 존재하는 차이들이 각기 다른 나라에서 인화한 의 각기 다른 색으로 시각화되었다. 대부분의 사진 작가들이 강박관념적으로 색조정에 매달리듯이 사람들은 사회가 정한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한다. 그러나 강요하고 강제한다고 해서 틈새에 끼인 차이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기존의 질서를 부수는 새로운 의미는 이러한 차이들을 인정하면서 발생하게 된다. 차이로 인해 발생되는 의미는 지엽적이거나 개인적인 조건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하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다. 또한 사진의 데이터가 실제 사진의 색을 조절할 수 없듯이 현실에서 발생되는 미묘한 차이들은 기존의 지식 체계나 사회 구조의 지배 범위를 넘어선다. 그래서 사회 안에 내재되어 있는 차이들을 우리가 쉽게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진에서 드러나는 색감의 차이를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백승우가 사진으로 차이를 시각화하는 방식은 탁월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사진은 재현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개념적인 매체로 등장하였지만 사진에서 우선적으로 다가오는 시각적 감각을 무시할 수는 없다. 는 세계 곳곳 13 개의 현상소에서 보내온 13 개의 다른 색감의 이미지들이 하나로 조합되어 완성되었다. 작가는 이렇게 제작된 사진 작업, 즉 전지구적인 네트워크 안에서 사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기존의 지식 체계에 수많은 오류들이 내재되어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그러나 사진 이미지를 통해 던지는 작가의 사회적 발언은 대형 사진의 스펙터클 안으로 숨어 들어간다. 대신 관객들에게 사진을 구성하는 각 이미지들의 미묘한 색감의 차이를 통해서 거대 구조의 틈새 안에 숨어 있는 차이들을 직접 눈으로 체험하게 한다.

백승우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고 그 후로도 계속 사진으로만 작업하였다. 이는 다양한 매체를 자유롭게 가지고 노는 동시대 예술가와는 사뭇 다른 태도이다. 그렇다고 백승우가 모더니즘적인 향수에 젖어 사진적 미학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끊임없이 사진에 대한 반역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사진은 이렇게 찍겠지’하는 통념을 매번 뒤집으며 사진이미지 내의 반전을 꾀하고 있다. 스트레이트 사진에서 디지털로 변형된 사진, 스냅 사진에서 연출 사진, 직접 촬영에서 기존 사진 차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진적 전략을 작가적 발언에 적절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이번 전시 《판단의 보류(가제)》를 위한 신작 중에는 5 만 장이 넘는 대량의 사진 아카이브를 이용한 작업이 시도되었다. 이는 작가가 매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기술, 그리고 매체의 특성을 정확하게 꿰뚫는 예리한 판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백승우는 사진에 집중하지만 사진 내에서는 매체를 자유롭게 가지고 논다는 점에서 동시대적이다.



(2004-2006, 2006-2008), (2005-2007), (2008) 등 백승우의 이전 작업의 제목들은 다소 직접적으로 작업을 설명하는 한편, 사진 기법에 대한 암시도 포함되어 있다. 서울의 위성도시 부천에 있는 테마파크의 모형 건물과 신도시 아파트 건축 현장을 대비시킨 은 실제의 풍경을 대형 카메라에 담아 대형으로 프린트한 스트레이트 사진이고, 2002 년 북한 방문 시 촬영한 필름으로 만든 은 일반 스냅샷을 확대해서 재구성한 사진들이다. 또한 는 작가가 일본의 작은 책방에서 수집한 북한의 홍보용 사진들을 디지털 사진 프로그램으로 조작한 이미지들이다. 이렇듯 백승우의 이전 사진 작업들은 제목만 보아도 대략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백승우의 사진에는 실제와 허구, 진짜와 가짜, 그리고 기록과 환상이 혼재되어 있고, 다소 직접적인 표현 방식으로 한국의 첨예한 사회적 문화적 사안을 대형 사진의 스펙터클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전 작업에서 다루어졌던 정체성의 문제, 이질적인 문화 현상, 그리고 전쟁과 분단의 문제는 그의 사진의 표면에 불과하다. 정작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고를 규정짓는 장치들과 그 장치들로 인해서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사고의 체계, 그리고 그 순환적인 고리를 사진적인 아이러니로 밝히는 것이다. 《판단의 보류(가제)》전에서도 백승우는 이미지와 이미지 내의 기호들의 얽혀진 관계를 풀고, 일방적인 사고를 강제하는 강박적인 관념에 벗어나, 다양한 의미 발생의 출구를 열려는 시도가 계속된다. 가족 사진에서부터 기업의 기록 사진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양의 사진 수집으로 시작되는 신작들을 통해, 작가는 사진이 갖고 있는 기록성의 문제와 기억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의 사진의 역할을 점검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보편화된 지식의 학습으로 경직된 사고를 유연하게 개방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사진가는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수집하는 사람이다.”3
이미지의 우연성과 학습된 시선

[Archive]는 백승우가 자신이 직접 촬영한 매일유업의 철거 전 공장 사진들과 뉴욕에서 레지던시할 때 수집한 오래된 공장 사진들의 오리지널 프린트, 그리고 경성방직이 1930 년대부터 70 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방대한 양의 회사 자체 기록 사진들을 이용해서 제작한 신작이다. 작가는 방대한 양의 기록 사진들 안에서 사진의 대상은 물론이고 시간과 장소, 그리고 사진을 촬영한 사람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이미지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이는 작가가 2002 년 북한에 갔을 때 찍은 사진들과도 일맥상통한다. 당시에 북한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누가 찍더라도 비슷한 사진 이미지를 얻었다. 사진 작가인 백승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한에서 돌아온 후 당시에 찍은 사진들을 내팽개친 이유도 자신이 사진가로서 그 지점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대상을 찍고 감시와 검열을 거치니 사진가의 흥미를 일으킬 만한 이미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이 찍었던 북한소녀의 모습을 어느 프랑스 작가의 사진에서 목격한 우연이 없었다면 [Blow up]시리즈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기이한 만남이었지만 예정된 만남이기도 하다. 2002 년 당시북한은 대규모 문화 행사를 벌여 많은 외국인들을 불러들였고 고립된 은둔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찾았다. 북한 관광을 한 외국 기자는 “하지마 관광”이라 빗대어 말하며 무엇이든지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북한의 금지 규정을 풍자했다. 휴대폰 소지나 망원경, 망원 렌즈 등이 금지되었으며 사진 촬영 시에는 더 엄격한 규정이 적용되었다. 그러니 프랑스 작가나 한국 사진가의 사진이 유사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를 계기로 백승우는 자신이 사진을 직접 찍는 것에서 자유로워진다. 어차피 개인의 시선이 사회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그로 인해 이미지가 정해진다면 굳이 자신이 찍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Blow up]에서 볼 수 있는 북한 사진들은 한국이 처한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권력과 감시의 문제가 표면으로 드러나 있다. 백승우는 감시와 통제의 시선을 사진안에서 관음적인 시선으로 가시화하면서 보는 이의 시선으로 통합시킨다. 그러나 사진 안의 시선은 단일하지 않다.4 감시와 통제를 비껴난 비가시적인 시선이 가시화된 시선의 너머로 산재되어 있다. 원본 사진의 뒷배경이나 구석에 조심스럽게 숨어 보는 시선들이 숨겨져 있었고, 북한 보안원의 감시망과 카메라의 눈을 피해 있던 숨은 시선들은 확대된 사진에서 드러나게 된다. [Blow up]시리즈에서 작가가 첨예한 북한 문제를 다룸으로써 이러한 시선들은 정치사회적인 문제로 유도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Archive]시리즈에서는 정치사회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어느 한쪽으로 관객의 판단이 고정되는 것을 유보하고 있다.

사진은 진실을 가장하고 현실을 모사한 듯하지만 사진 이미지 내에는 결코 객관성과 부합되지 않는 내적 모순이 있다. 사진 이미지는 현실을 투명하게 반영하기 때문에 그 안의 기호와 코드들이 읽혀진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이런 은폐의 과정을 ‘자연화(naturalization)’ 혹은 ‘기호를 순진하게 만들기’라고 하였다.5 즉 사진을 보면서 사진 속의 인물과 사진을 동일시하거나 사진 속의 사건을 실제의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바로 사진의 ‘자연스러움’이다. 그러나 자연히 일어난 듯 보이는 사진 속의 의미들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기호를 구성하는 기의들은 온갖 기표들이 난무하는 복잡한 사회 구조 안에서 제대로 된 위치 찾기가 어렵다. 또한 사진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전의(???) 텍스트들이 특정한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지점에서 서로 겹쳐지는, 복합적인 ‘상호텍스트성’으로 읽혀지기 때문에 의미의 해석이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다. 6 같은 사진을 보아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것이 그 예이다. 사진 이미지도 언어와 같이 의미가 고정되지 않는다. 더구나 시간과 공간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이미지로 조합된 사진 전시의 형식에서 이미지의 해석은 더 모호해진다. 에서 보이는 이미지의 유사성은 사진에서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들이 얽혀 들어가는 지점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진 안의 코드들이 자연스럽게 의미를 구성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어 문자적으로 사진을 읽어내기가 어렵다.

여기서 사진가의 역할은 더 미미하다. 백승우가 2008 년에 방문한 매일유업의 옛 공장의 모습은 사진 작가에게는 쓰레기통 하나마저 초현실적으로 다가왔고, 그는 작가적 열정으로 이 공장의 허물어져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러다 우연히 1930 년대부터 70 년대까지의 경성방직의 회사 창고에 방치된 대량의 회사 기록 사진을 보게 되는데, 무명의 회사원들에 의해 기록된 경성방직의 옛 공장 사진들이 자신이 기록한 2000 년대의 매일유업 사진들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이든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는 작가가 뉴욕 레지던시로 있을 때 사모은 오리지널 프린트 중 산업 기록물 사진에서도 비슷한 발견을 하게 된다. 사진으로 사물을 기록할 때에는 일정한 법칙이 강제된다. 여권 사진을 예로 들면, 배경은 흰색이어야 하고, 인물은 정면을 봐야 하고 어깨가 기울여져서는 안되고 입술은 다물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있다. 기록으로서의 사진은 권력에 의한 감시와 통제의 도구이다. 푸코가 추적한 바에 의하면, 19 세기 중반부터 사진은 공장, 병원, 소년원, 학교, 군대, 가정, 언론, 정부기관, 과학기술원 등 사회의 거의 모든 기관의 감시의 역할을 맡아왔다. 사진은 진실의 도구로서 관찰, 기술, 재현, 기록의 역할을 하며 지식의 장을 생산하는 데 기여하며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기 위한 권력에 연결되어 있다.7 백승우가 각기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수집하고 촬영한 사진들에서 보이는 이미지의 유사성에서는 특정 장소의 기록을 위해 사진에 가해지는 특정한 조건이 보여진다. 여기서 사진가는 부재한다. 여기서 사진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 그리고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감시의 시선에 의해 이미 구성된 이미지가 저절로 생산되는 것이다. 1950 년대 대한민국의 방직 공장의 모습이 시간과 장소를 알 수 없는 뉴욕 한구석의 공장과 유사한 것은 우연이라기보다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과 조건에 의한 당연한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누가 찍더라고 비슷한 이미지가 나온다는 사실에 작가는 사진가로서 무력함을 느끼는 동시에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건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Archive Project] 가 누가 보는 방법을 결정짓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제까지 저항 없이 이미지를 바라보고 판단했던 방식을 방해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장소와 시간, 그리고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는 [Archive Project]의 기록 사진들은 사진 이미지 내의 복합적인 코드들이 정교하게 얽혀나가는 것을 서로 방해하면서 사진이 주는 ‘자연스러움’을 해치고, 이미지의 해석을 한곳으로 몰아가는 것을 저지하고 있다. 이로 인해 기존의 지식 체계나 그로부터 강제되는 보는 방식으로부터 보는 이는 자유로워지고 이미지는 모호해진다.

백승우는 보편화된 지식과 획일화된 사회의 사고 체계를 벗어나는 지점을 다른 보는 방식으로 제시하며 왜 꼭 그렇게 봐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사회가 원하는 이미지 안에 개인이 관여할 수 없다면 그 중간 어디로 삐뚤게 바랄볼 것을 제시한다. 작가는 그러한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사진의 솔기 없는 자연스러움” 8을 깨뜨리고자 한다. 사진의 배경, 장소, 시간 등의 이미지의 콘텍스트를 구성하는 요소들과 이미지를 분리시키고, 단지 유사한 이미지의 나열로 기호학적인 사진 읽기를 훼방 놓는다. 또한 한 이미지 내에 두 개의 사진을 잇는 디지털 조작의 흔적을 남기면서 시각적인 부자연스러움을 도모하고 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의미를 저지시키는 장치들을 이미지에 삽입하여 관객에게 이미지를 바라볼 때의 일방적인 판단을 보류시키고 잠시 시간을 갖고 다양한 의미의 발생을 지켜볼 것을 권유한다.

“존재했던 이야기와 존재할 법한 이야기”
확신이 불확신을 만든다

사진에서 기억과 기록은 진부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이다. 사진 이론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에서 사진과의 대면은 어떤 사진 이미지를 읽을 수 있는 순간 이전의 단계로 어떤 찌름, 즉 푼크툼(punctum)이라 하였고, 이는 지극히 사적인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9. 2000 년에 발표된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백승우의 [Memento]는 사진과 기억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시작된다. 영화 [메멘토(Memento)]에서 준비하는 주인공은 15 분마다 사라지는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기 위해 메모와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기록을 남긴다. 기억을 유추하기 위해 시간을 역으로 따라가고 메모에 적힌 단어와 사진의 조각들을 조합하며 스토리를 만들어나가지만 결국 주인공은 기억의 모티브인 메모와 사진에 매달리며 기억과 망각, 그리고 그 사이의 수많은 오류를 범하다 결국 파멸에 이른다. 사진은 현전도 아니고 단순히 부재도 아니다. 사진은 어떤 것이 있었던 흔적이고, 흔적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불확정적인 것이다. 또한 사진은 기억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이미지를 고정시킴으로써 기억을 감퇴시키기는 역작용도 있다. 사진을 보면서 대상을 그리워하지만 실제로 사진의 인물을 만났을 때 낯섦을 느끼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사진 안의 이미지에 익숙해져서 실제의 대상에 대한 기억은 사라져버린다. 사진은 대상과는 별개의 독립된 실체가 되었는데 보는 이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사진과 기억은 스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고 현전하는 실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것저것 모으는 것을 좋아하는 백승우는 2009 년 미국 체류 시 5 만여 장의 사진을 수집하게 된다. 한때는 한 가정의 기록으로 소중히 여겨졌을 가족 사진들이 창고 세일에서 팔리게 되는 신세가 되었고, 장소와 시간을 달리하면서 가족 사진으로서의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작가는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익명의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유심히 보면서 사진 안의 인물들을 상상하고, 배경을 통해 사건을 유추하며,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게 된다. 1970 년대 소형 카메라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가족 사진은 유행처럼 미국 사회에 퍼지게 된다. 사진이 개인의 삶에 관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면서 가족의 역사를 기록하는 유효한 장치로 등장한다. 가족 사진의 신화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연출하는 데 있다. 거실 중앙에 장식되어 있는 가족 사진은 그 가족이 행복하다는 증거로 작동한다. 그런 이유로 가족 사진은 자신과 상관없는 사진일지라도 비슷한 신화적인 의미를 보는 이에게 주입한다. 『카메라 루시다』에서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니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진들을 끌어들인다. 결국 마지막까지 독자들은 바르트 어머니의 사진을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진의 반복적인 등장에 의해 스스로 이미지를 그리게 된다. 백승우도 [Memento]에서 비슷한 이미지 놀이를 관객에게 제공하고 있다.

5 만여 장의 사진 중 2,700 여 장의 사진을 먼저 추려놓은 후 8 명의 사람들에게 각각 8 장씩 선택하라고 한다. 임의로 구성된 8 명의 사람들은 각자의 기억과 사진 이미지 내의 기억을 읽으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있을 법한 이야기는 있었던 이야기가 되어 전시장에 전시되고 이를 보는 관객은 자신의 기억과 전시된 사진 내의 기억을 뒤섞으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의미는 발전하고 변형되고 계속 재생산되다. 확신이란 존재하지 않고 불확실한 이야기들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뻗어나간다. 마치 기억의 도미노와 같이 자신의 기억은 다른 사람의 기억과 혼합되며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개인적인 기억은 인식의 복잡한 과정으로 인해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계속 생성되어 나간다. 여기서 사진은 기억을 되살리는 매개체이자 현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양면의 거울이다. 사진 이미지 안의 진짜 있었던 이야기는 보는 이의 기억과 더불어 있을 법한 이야기로 바뀌어간다. 원본의 사진이 복제되듯이 실체가 없는 의미의 복제는 실체보다 더 현실처럼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각인된다. 실제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사진의 의미는 견고하고 고정된 지식 체계에서는 설명이 안 되는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의미를 생산하며 끊임없이 생성되어 나간다.

부유하는 이미지


(월화수목금토일) x (아침, 점심, 저녁), 총 21 개의 이미지가 [Seven Days]에서 선보인다. 시간성에서 기인한 듯한 작품 제목은 사실 시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또한 사진 이미지와도 아무 관련이 없다. 작가는 제목을 통해서 분류 체계의 임의성에 대해서 말하는 듯하다. [Seven Days]에서 텍스트와 이미지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인 것과 같이 어떤 연관성도 없다.10 사진의 대상은 일본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도쿄 소재의 건물들이다. 그러나 그 사회의 역사적 사회적 지리적 지식이 없으면 관객은 사진 속 건물이 지닌 상징성을 알 수가 없다. 관객에게 사진 속의 건물은 단지 표면적인 피사체일 뿐이고 일차적으로 건축적인 조형미와 사진적인 아름다움만이 다가온다. 작가는 도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들을 사진의 대상으로 삼았으면서 그것들의 역사적 사회적 상징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렸다. 이미지는 각자 교육받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이러한 자의적인 해석은 판단의 오류를 범하고 소통을 어렵게 만든다. 그리하여 백승우는 이미지를 해석하는 장치들을 가능한 지워버리고 이미지의 표면만을 남기려는 시도를 한다. 그로 인해 의미는 모호해지고 사진은 대상으로부터 독립한 또 다른 실체가 된다. 결국 사진은 이미지이다. 빅터 버긴(Victor Burgin)은 사진을 볼 때 대상에 대한 파악이 이루어지기 전에 부딪치는 시각적인 경험을 ‘전사진적인 단계’라고 하였다.11 사진이란 대상으로부터 독립하여 또 다른 실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것이 지식이든 감각이든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대상과의 만남이다. 현대 사회는 이미지의 사회이다. 그러나 넘쳐나는 이미지로 인해 기표와 기의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대상을 바라볼 때 눈에 의한 감각 이외에 사고를 유도하는 장치들을 가능한한 제거하고 이미지는 어차피 불확실한 것이다. 언어, 이미지, 텍스트, 그리고 그것을 읽어내는 코드와 장치들은 너무 복잡해진 사회에서 더 이상 신빙성을 잃어버렸고, 보는 이의 판단을 일방적으로 오도한다기보다는 오염되지 않는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진을 읽지 말고 체험하기를 권유한다.

눈으로 체험하기
결과적으로 백승우는 사진 매체의 특수한 시각적 경험을 통해 보는 이에게 유연하고 개방된 사고를 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Archive Project], [Memento], [Seven Days], 이 세 작업은 읽는 사진이 아니라 느끼고 경험하면서 의미가 생성되는 방식에 관여하는 감각적인 사진이다.  작가는 사진 안의 코드들과 의미 생성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미끄러지게 하여, 사진의 기호학적인 의미 분석이나 사진 외적인 콘텍스트들에 의존했던 사진 읽기가 허구적이고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미지 안의 의미는 자연적으로 생성되고 유동적으로 발전해가는 것인데, 강요되고 학습된 사고 체계 안에서는 오도되어 갇혀버린 의미들이 다른 의미의 발생을 저지한다. 백승우는 기억과 기록에 관여한 사진의 특수성을 감각적으로 관객에게 제공하며 의미 생산의 유연함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차이에 대해 인식하고 차이에 의한 의미 발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동시대의 지식은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보편화된 지식으로부터 섬세하고 유동적인 형태의 지식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친숙하고 익숙한 사적인 공간에서 미묘한 차이가 작동하는 지점이고, 삶의 방식에 관여하는 일상적인 사소함으로 드러나게 된다. 보편적 이성적 효율적인 사고 대신에 파편적이고 감성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사진의 감각을 통해 깨닫게 한다. 백승우의 사진은 눈으로 보는 단계를 넘어서 체험하는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1.이 책에 실린 김선정, 「백승우와의 인터뷰」, p.170.
2.여러 나라의 현상소에 인화를 의뢰하여 사진을 제작하는 시도는 이번이 두 번째로, 2009 년 대림미술관에서 열렸던
≪경계에서≫ 그룹전에서 <마이 라이프 인 워(My Life in War)>라는 작업을 같은 방식으로 진행했었다. 김선정,
「백승우와의 인터뷰」, p.163.
3.필자와 백승우의 전화 인터뷰.
4.Victor Burgin, “Looking at Photographs” Thinking Photography, (London: MacMillan, 1982), p. 148.
5. Roland Barthes, “Rhetoric of the Image”, Image-Music-Text, trans. S. Heath (London: Fontata, 1977), pp.
32-51.
6. Victor Burgin(1982), 위의 책, pp. 142-153.
7. 장 클로드 르마니 · 앙드레 루이에 (편저), 정진국 (역), 『세계사진사』 (서울: 까치글방, 2003), pp.87_89.
8. Victor Burgin(1982), 위의 책, p. 150.
9. Roland Barthes, 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Richard Howard [trans.] (New York: Hill and
Wang, 1981).
10. Ferdinand de Saussure,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 publié par Charles Bally et Albert Sechehaye
(Laussanne/Paris: Payot,1966), pp.100_102.
11. Burgin, “Looking at Photographs,”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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